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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치유와 위로를 갈망하는 시대

서점에서는 스님들의 책이 앞다투어 팔리고, TV에서는 힐링캠프와 같은 프로그램이 유명인들을 불러 치유의 방법을 묻고 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고민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토닥토닥’, ‘쓰담쓰담댓글이 위안을 주고 있다. 의사는 병을 막으려면, 하루 한번이라도 하늘을 보며 이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 전체가 상처를 받고, 지쳐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거대한 심리가 불안과 공포이기 때문이다. 직장을 잃을까봐, 재산을 잃을까봐, 미래가 막힐까봐 많은 사람들이 두렵고 힘들다. 무한 경쟁시대, 갈등과잉시대 등 시대를 표현하는 언어들도 역시 지쳐있기는 마찬가지. 우리는 지금 다들 너무 힘들다. 

이 불안과 공포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한마디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탓일 거다. 짧게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위기로부터 시작된 세계경제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좀 더 길게는 IMF에서 시작된 개방경제와 양극화의 확대, 그리고 지난 수십년동안 익숙하게 성장했던 사회가 갑자기 정체되고, 지향점을 알 수 없게 빠르게 바뀌고 있는 기술과 문화에서 비롯된 것일 거다.

지금 들어도 먼 미래 같은 서기 2000.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광화문 광장에서 새로운 세기의 탄생 버튼을 누르며 환호했던 그 희망과 비전의 꿈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우울해졌다. 익숙한 방식으로는 어느 것도 쉽지 않다. 남들처럼 학교다니고, 결혼하고, 애낳고, 직장 들어가고, 꿈꾸는 그 어느 것도 쉽지가 않다. 우리는 말 그대로 죽어라고살고 있다. 삶을 삶답게 살지못하고, 죽어라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우리는 무한 경쟁에 노출되며 힘겨운 생존 게임에 시달리고 있다. 불안해질수록 더 기득권에 안주하고, 과거의 추억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 싸움의 본질은 좌우 이념도 아니고, 성장과 분배의 발전방법론도 아니다.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문제인 것이다. 모두가 헐벗고 핍박받던 시절의 우리는 이미 가진자와 못가진자, 부리는 자와 핍박받는 자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가진자는 가진자대로, 못가진자는 못가진자 대로 불안하고 두렵다. 미래가 어둡기 때문이다.

불안한 사회속에서 사이비종교나 극단적 이념, 퇴행적 환락, 폐쇄적 취미와 소시민적 삶.. 이런 것들이 지친 우리가 그나마 손쉽게 위로받는 방법들이었다. 싸움을 원하는 자는 극렬하게 싸우고, 극단적 이념과 종교에 빠진 자는 세상을 거부하거나 공격했다.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 골방에 틀어박히거나,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소시민으로 꽃사진과 여행, 음식, 스포츠에 몰두하며 애써 세상에 초연해진 사람들도 많아졌다.

사회적 멘토가 각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이 해왔던 일들은 바로 치유의 일이었다. 힘겨운 사람들에게 함께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실천해왔다. 지친 젊은이들의 말을 귀기울여주고 서로 논의해왔다. 싸움보다 치유가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주장을 말하기 보다, 아픔을 들어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치유와 위로가 정치의 영역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치유와 위로, 그리고 희망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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